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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황종섭] 한국의 ‘임대차 정글’ 속에서

여기 카페를 운영하는 사장님이 있습니다. 고려대 74학번으로 대기업에서 이사를 역임하고, 2010년 55세의 나이로 정년 퇴직하였습니다. 그리고 노후를 위해 카페를 차렸습니다. 권리금 1억 6200만원, 인테리어 및 시설비 등을 포함해 2억 8000만원의 초기자금을 투자했습니다. 퇴직금과 저축한 돈, 은행 대출까지 합했습니다. 이렇게 2011년 7월 강남역 근처에 조그만 카페 라떼킹(Latte King)이 문을 열었습니다.


수법은 늘 똑같습니다. 어떤 임대인(혹은 대리인)이든 처음 계약할 때, 5년이고, 10년이고 장사를 계속할 수 있도록 보장하겠다는 호언장담을 합니다. 이 말대로 별 탈 없이 5년 이상 장사를 한다면 다행도 이런 다행이 없습니다. 하지만 라떼킹 사장님은 운이 없었습니다. 이제 자리를 좀 잡았다는 생각이 들 즈음, 임대인으로부터 재건축을 할테니 나가라는 통보를 받습니다. 장사를 시작한 지 2년이 채 되지 않은, 2013년 6월의 일입니다.


이건 전적으로 운에 달린 일입니다. 라떼킹 사장님은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그저 법대로 열심히 살았을 뿐입니다. 2년을 땀흘려 일해 단골 손님도 생기던 참이었습니다. 하지만 임대인이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한 사람(또는 다수의 임차인)의 운명은 롤러코스터를 탑니다. 여기서 개인의 노력 따위는 변수가 아닙니다. 열심히 일하면 보상을 받는다? ‘임대차 정글’에서는 어림 없는 일입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할까요? 현행 「상가건물 임대차보호법」(이하 상임법) 자체에 문제가 있습니다. 말이 ‘임대차 보호법'이지 실제로 벌어지는 양태를 보면 ‘임대인 보호법'에 더 가깝습니다. 상임법에 따르면 임대인은 임차인에게 5년의 영업 기간을 보장해야 하지만, 예외를 크게 인정하여 사실상 누구나 피해갈 수 있습니다. 라떼킹의 사례와 같이 임대인의 재건축 의사만을 가지고도 임차인을 쫓아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재건축을 하고 안 하고는 나중 문제입니다. 결국 라떼킹 사장님은 2014년 8월 21일, 명도소송에서 패소합니다.



언뜻 생각하면, 임대인이 임차인을 쫓아낼 경우 임차인이 교체될 때까지 월세를 못 받으니 손해가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엔 강력한 유인이 있습니다. 바로 권리금입니다. 권리금은 현행 상임법을 포함한 어떤 법에서도 정의하고 있지 않습니다. 실제로는 계약을 할 때 아주 당연히 주고받는 돈이지만, 법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임대인은 임차인의 권리금이 탐납니다. 법적으로 임차인이 권리금을 보장 받을 방법이 없으니, 임대인은 법으로 다투면 무조건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라떼킹의 경우 1억 6200만원의 권리금을 냈습니다만, 재건축으로 인한 명도집행을 당하면 단 한 푼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권리금을 받으려면 신규임차인에게 받아야 하는데, 재건축을 하면 이마저도 가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증발한 권리금은 어디로 갈까요? 권리금을 내고 장사를 한 임차인이 아니라 임대인이 신규임차인에게 받습니다. 가만히 앉아 1억 6200만원을 버는 것입니다. 만약 현재 장사가 잘 되고 있다면 기존 권리금보다 더 많은 돈을 신규임차인에게 요구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장사가 잘 될수록 쫓겨날 확률이 높아지는 임차인의 딜레마가 생깁니다. 


이렇게 생긴 권리금은 다시 임차인 사이를 돕니다. 그러다 양도를 못하고 임대인에게 쫓겨나는 임차인이 권리금 덤터기를 씁니다. 임차인들은 이것을 ‘권리금 폭탄 돌리기'라고 부릅니다만, 제가 보기에 ‘재산 강탈'이 더 정확한 표현인 것 같습니다. 상대적으로 더 가진자(임대인)가 덜 가진자(임차인)의 재산을 합법적으로 강탈하는 것입니다.


상가임차인 문제가 계속 불거지자 지난 9월 23일 법무부는 권리금 양성화를 골자로 한 ‘상가건물 임대차보호법 개정안'을 발표했습니다. 누가 봐도 가진자들의 편인 현 정부도 권리금 문제의 심각성을 인정한 것입니다. 물론 개정안이 그대로 통과된다 해도 예외가 현행과 같이 존재하기 때문에 문제가 하루아침에 해결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권리금을 법에서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다양한 법적 다툼이 가능해집니다. 임차인의 권리가 조금이나마 더 보장되리라 기대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정부의 개정안 발표가 저절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번 개정안 발표는 수많은 임차인들이 나서서 억울함을 호소한 결과입니다. 임차인들은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법이 임차인을 보호하지 못한다면 임차인들이 스스로를 보호하겠다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래서 법적으로도 다투는 한편, 강제 퇴거(명도집행)를 힘 합쳐 막아내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노력이 정부의 개정안 발표로 이어진 것입니다.



제가 속한 노동당 서울시당은 맘편히장사하고픈상인모임(전국상가세입자협회)과 함께 지난 8월부터 매주 목요일 <상가임차인 권리상담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임대인의 횡포를 폭로하는 기자회견과, 강제 퇴거를 막기 위한 행동도 함께 해왔습니다. 그럴 때면 도와줘서 고맙다는 얘기를 자주 듣는데, 저는 매번 고마워하실 필요 없다고 손사래를 칩니다. 왜냐하면 이건 누가 누굴 돕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임대인에 의한 재산 강탈은 ‘임대차 정글’에서 임차인이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입니다. 다만 라떼킹 사장님을 비롯한 많은 임차인들이 남들보다 조금 먼저 겪고 있을 뿐입니다. 저는 오히려 잘못된 법과 제도에 맞서 싸우는 분들께 감사와 연대의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힘들어도 피하지 않고 정글을 헤쳐나가는 분들 덕분에, 세상은 좀 더 살 만한 곳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황종섭 (노동당 서울시당 조직국장)